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
감옥에서나 망명지에서 항상 대통령 준비를 해왔다는 그는 일흔네 살에야 꿈을 이뤘지만 정작 부도난 국가를 떠맡게 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IMF 외환위기라는 폭탄을 맞아 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 날부터 실질적 대통령 역할을 하며 나라 경제를 챙겼다. 또 햇볕 정책을 펼쳐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켰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선 북한인권법이 통과되고 대선에서도 한반도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정부에선 은근히 김 전 대통령에게 대북특사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고, 북한에서도 그의 방북을 바란다고 한다.
[간략]
1925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 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여전히 제1야당의 실력자로 알려졌다. 1995년 6월에 시행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고, 같은 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계파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 생활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끌어낸 뒤 같은 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끌어냈다. 또한, 50여 연간 지속하여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적 정권교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50여 연간 지속하여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IMF 구제금융 관리체제의 극복 및 청산]
김대중 정권은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경제위기를 물려받고 출발하였다. 경제위기는 1997년 11월 금융위기와 함께 시작하였다. 동시에 김영삼은 대통령으로서의 지도력을 상실하였으며 12월에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이 금융위기의 해결에 있어서 국내외적으로 실질적인 대통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국과 IMF는 한국의 대외부도를 막기 위해 긴급자금을 지원토록 하면서 동시에 한국에 대하여 한국경제 전반에 걸쳐 이른바 구조조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1998년에 -7%의 성장률을 보였던 경제도 1999년에는 11%의 성장률을 보이는 등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그리하여 2001년 8월에는 IMF 차입금을 예정보다 빨리 상환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대중 정권은 초기의 금융위기와 그다음의 경제위기를 국민의 협조로 잘 극복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는 97년 대선에서 약속한 대로 2년 만에 IMF 구제금융의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음 → IMF 전후 주요 경제지표 변화 설명 경제성장률 : 98년 -5.8%에서 99년 10%로 증가 경상수지 : 97년 82억 적자에서 98년 406억 달러, 99년 260억 달러 흑자로 전환 환율안정 : 98년 1월 달러당 1,573원에서 2000년 1월 1,123원으로 안정 가용외화보유액 : 97년 12월 39억 달러에서 2000년 1월 현재 768억 달러로 증가, 올해 중 1,000억 달러 예상 단기외채 비율 : 97년 9월 말 54.2%에서 99년 11월 말 28.0%로 감소 주가지수 : 97년 12월 376.3P에서 2000년 1월 943.8P로 수직상승 물가(전년 대비) : 98년 7.5% 인상에서 99년 0.8%로 사상 최저 물가 실업자 수 : 98년 178만 명에서 2000년 1월 현재 100만 명으로 감소 중소기업 : 97년 2만3천 개 도산,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3만 개 창업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 1월 25일 자, 깡드쉬 [IMF 총재] = 한국 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을 지도자로 모신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김 대통령이 있었기에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경제구조개혁을 지속해서 추진해야 한다. Asia Weekly 최신호 = 김 대통령은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다. South China Morning Post誌 =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거꾸로 돌린 것과 같다.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AWSJ) 1월 24일 자 사설 = (대우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 김대중 정부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장기적으로 정부의 역할을 줄여가려는 김 대통령의 의지가 있는 한 한국경제는 더욱 건실해질 것이다. 독일 일간지 Handelsblatt(한델스브라트) 2월 26일 자 = 한국은 마치 잿더미 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처럼 경제위기로부터 회복되었다. 블라드미르 [前 러시아 부총리] = 김대중 대통령을 러시아에 2년만 빌려주면 러시아 경제가 회복될 것이다. 윌버로스 [미국 로스차일드펀드 회장] = 인도네시아가 외환위기로부터 조기 탈출하기 위해서는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도널드 그레그 [前 주한미국대사(1989~92년)] = 김 대통령이 재임 동안 계속해서 개혁의 행보를 늦추지 않는다면, (한국은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앱샤이어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이사장] = 김 대통령은 큰 좌절을 극복하고 한국을 자랑스럽고 안전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도록 국민을 이끌어 갈 이 시대에 맞는 지도자이다. 존 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 한국 국민은 여전히 정치·경제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대처의 성공 여부는 김 대통령의 끊임없는 용기, 의지, 능력에 달려 있다.
[햇볕 정책]
김대중 위 3단계 통일론:
1) 남북연합단계 2) 연방 단계 3) 완전통일단계
김대중 정권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남북 간의 적대관계를 크게 완화했다. 그 결과 평양에서 김정일과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이어서 서울에서는 첫 남북 국방장관회의가 있었다. 햇볕 정책! 통일을 위한 유화적인 자세,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1998년 4월 3일 영국을 방문했을 때ㅡ런던대학교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던 `이솝의 우화'에서의 비유다. 대북 교류협력을 화해, 포용으로 증진하겠다는 우호적인 정책이다. 여기에는 경제적 지원이 크게 저류를 이루고 있다. 첫째는 경제협력의 활성화. 둘째 투자 규모의 제한 철폐 등이다. 일부 국민은 햇볕 정책에 불만이 있다.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시기상조론을 주장한다. 현재 상황으로는 타주적(他主的) 거래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남북 대화와 북을 돕는 자세가 긴요하다. 햇볕 정책의 본원적 의미가 뭔가? 추운 겨울 두터운 모피 코트를 벗겨주는 온유한 작업이라면, 북에 대한 지원은 복선 없이 증폭시켜 나가야 타당할 것이다. 이 점, 역사관이 불건전한 정신 풍토에서 깨어나야 한다. 금강산 관광과 함께 개성공단 건설,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사업 등 이른바 3대 경협사업도 본궤도에 올랐다.
정부가 지원한 민간 베이스 사업인 금강산관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육로 버스 관광을 거쳐 승용차 관광의 단계까지 올랐다. 개성공단 건설은 지난해 12월 15일 시범단지에서 첫 제품이 출하되어 당일 생산된 북한산 냄비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판매돼 서울 시민의 밥상에 오르는 단계에 진입했다. 남북의 허리를 잇는 경의선·동해선도 2002년 9월 18일에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 열려 지난해 12월 연결이 완료되어 임시 개통되는 데 이르렀다.
남북은 또 지난 5년간 총 124번, 연평균 24번 이상의 각종 대화를 가졌다. 장관급 회담의 경우 2000년 7월 이후 지난해 5월까지 모두 14번이 개최되었다. 그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달 21∼24일에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림으로써 다시 남북 대화가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군사 분야에서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신뢰구축의 실마리가 마련됐다. 휴전선에서의 상호 비방방송은 이미 자취를 감췄으며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방지방안에도 합의했다. 남북한 군 당국이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마주 앉아 장성급 회담(2회)을 개최해 비록 초보적 수준일망정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공존의 실마리를 마련한 덕분이다
"북한 인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북한은 정치-사회적 인권이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는 원초적 인권이 더 중요합니다. 탈북자들도 북한 독재에 대한 반대보다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겁니다. 그런 원초적 인권을 제일 도와주고 있는 게 한국입니다.“
“북핵 문제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데 내가 볼 때 북한은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입니다. 북한이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나요? 또 북한에 핵이 있다 한들 미국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죠. 북한의 목적은 사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나 죽이면 너 죽이고 나 죽는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김정일에게 강조한 말: “당신들이 핵이라든가 대량파괴 무기를 개발한다는 말이 있는데 절대 안 된다. 미국 감정 조장하고 남한도 절대 지지할 수 없습니다.”
부시 대통령에게는 :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람치고 공산주의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전 사회가 감옥 같은 나라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린 같은 민족이고 통일할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대화해야 한다. 대화라는 것은 맞는 사람끼리만 하는 게 아니다. 서로 안 맞는 사람, 심지어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끼리도 해야 합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도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도 했지만 소련과 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장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단일 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지키고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워 왔다. 그러나 광복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민족의 동질성은 크게 훼손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한 남북 단절에서 비롯된 민족적 장벽을 허물고 통일을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통일이란 단순히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분단으로 인해 상실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사상, 생활양식, 제도 등의 남한과 북한과의 이질적인 요소를 사회, 문화적으로 통합해 나아가는 것이 선결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의 대북한 정책은 그의 대북한 적극 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국민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으로 인하여 인해 남한에 있어서 비록 그 방법과 진행속도에서는 이견이 적지 않지만, 남북관계 개선은 기본방향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정책이 되었다.
[노벨평화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했다고 했다. 한국이 수십 년간 권위주의가 통치하고 있을 때, 여러 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점차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 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 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햇볕 정책'을 통해 김 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한 남북한 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왔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의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문학상과 평화상 수상자는 많은 사람이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상을 받기 전에도 세계 3대 인권 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4년 동안 꾸준히 수상 후보에 올랐던, 영예는 참으로 청사에 빛날 쾌거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수차에 걸친 국제행사를 치러온 문화 국민으로 평화를 표방했다. 그러나 행사 뒤끝마다 노벨상이 없는 나라라고 부유한 열강들은 한국을 동정했다.
평가 어록:
“역사의 가장 값진 승리자, 김대중, 그는 복수하지 않았고 대신 고뇌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접었다. 그러나 봄밤이 아플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이제는 늙어버린 가신들을 불러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소쩍새 울음을 타서 술 한잔 건네기를 바란다. 그들도 떠나갈 때가 되었음을 알 것이다. ”
경향신문 김택근 부국장 wtkim@kyunghyang
“자유롭고 즐겁게 인터넷에서 놀 수 있는 정보화 사회의 기반을 마련해주신 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서는 망할 찌라시들 덕에 과소평가 내지는 폄하되었으나 해외에서 더욱 존경받고 사랑받는 분…….“ (어느 블로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보다 좋은 점은 인정하고 후세의 대통령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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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젊은’ 리더십
특히 김 위원장의 모습은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난 우리 젊은 세대를 당황케 했다. 왜냐하면, 김위원장은 귀하게 자라고 예술에 심취해,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하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지도자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TV 화면을 통해 여유가 넘치는 그의 모습에서 상당히 호방하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일부에서는 1인 보스정치에 얽매여 소신과 패기 없이 그저 말 바꾸기만 하는 우리 정치인들과 비교해 김 위원장을 ‘통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로 영웅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김 위원장의 독특한 이미지 관리는 영화광에다 TV 등 언론매체에 밝은 그의 리더십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있다. 즉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연기해 우려를 자아내게 한 후 의표를 찌른 공항영접 등으로 극적 반전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김 위원장의 자신감 넘치는 행동도 관심의 초점을 자신에게 맞추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실제로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은 예상과는 달리 협상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우선 대화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적극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협상에서 주도권 잡기는 김 대통령의 장기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선 오히려 김 위원장이 대화를 주도했다. 김 대통령은 주로 듣는 자세로 일관했고 다소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젊고 패기 있는 김 위원장의 자세가 김 대통령의 논리와 치밀함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었다. 즉 김 위원장은 ‘젊고 패기 있는 리더십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 셈이다. 특히 2박 3일간의 짧은 정상회담이었기에 리더십에 기초한 그의 순발력이 더욱 빛나 보였다.
결과적으로 김 위원장은 이번 회담을 통해 단숨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산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한편 이번 회담은 김 대통령에게는 대단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집권 3년째인 임기 중반을 맞아 여소야대 정국 아래서 정국의 주도권 확보와 안정적 유지를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이 요구되던 김 대통령으로서는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므로 일정과 의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한 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은 매우 도전적인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방북 일정이 하루 연기됐을 때 김 대통령은 무척이나 긴장했을 것이다. 또 정상회담이 구체적인 성과 없이 끝났다면 대단한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상회담 내내 김 대통령은 무척이나 긴장하고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차분·논리 vs 활달·감
김 대통령은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과장된 표현이나 제스처를 취하는 일 없이 차분하고 노련하게 대화를 유도했다. 김 대통령은 원래 꼼꼼한 준비와 정연한 논리, 그리고 정확한 근거 제시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그의 이러한 리더십은 100% 발휘됐다. 2박 3일간의 짧은 정상회담을 통해 ‘차분·논리’에 기초한 김 대통령의 리더십과 ‘활달·감’에 기초한 김 위원장의 리더십은 대조와 조화를 이루며 남북공동선언을 끌어냈다. 이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리더십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리더십에 관한 연구 중 가장 선구적이고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분석방법은 개인의 심리적 측면과 특성을 강조하는 ‘바버(James Barber)의 분석 틀’이다. 바버는 대통령의 개성(personality)은 크게 성격(character), 세계관(world view), 행위방식(style)을 포함하며 이러한 개성은 상당히 정형화돼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특정 대통령의 개성은 그가 직면한 국민의 기대감을 포함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이러한 개성은 대통령의 행태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바버는 대통령의 개성이 그들의 ‘활동 에너지’와 ‘정치적 직무에 대한 태도’로 표출된다고 보았다. 활동 에너지는 개인이 얼마나 활동적이냐 비활동적이냐를 분석하는 것이고, 정치적 직무에 대한 태도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 생활을 즐기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바버는 먼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성격 또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활동 에너지와 직무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적극-긍정형(active-positive)’, ‘적극-부정형(active-negative)’, ‘소극-긍정형(passive-positive)’, ‘소극-부정형(passive-negative)’으로 분류하면서 대통령의 심리적 특성과 국정 운영 결과의 관련성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적극적 대통령은 넘치는 활동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소극적 대통령은 쿨리지 대통령(꼭 11시간 잠을 자고, 낮잠을 즐김)처럼 근본적으로 활동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긍정적 대통령은 대통령직 수행에 큰 기쁨을 가지나, 부정적 대통령은 대통령직 수행에 최소한의 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중요한 점은 네 가지 유형 중 어느 유형이 다른 유형보다 좋다거나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형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유형의 장점이 발휘될 때는 대통령의 개성이 국정 운영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단점이 드러날 때는 개성이 국정 운영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바버는 이러한 분석 틀을 이용해 지도자의 개성을 분석하면 향후 그의 국정 운영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바버의 분석 틀을 이용해 김 위원장과 김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을 중심으로 리더십을 분석해 보자.
먼저 2박 3일간의 김 위원장 행동을 보면 그는 ‘적극-긍정형’ 리더십에 해당한다. 이러한 리더십 유형의 장점은 대체적으로 성취욕이 강하고 결과(results) 중심적 국정 운영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끝맺음 없이 너무나 많은 일을 벌이고 단기적 시각으로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 유형에 속한 인물 중 성공적인 대통령으로는 미국의 제퍼슨, F. 루스벨트, 트루먼, 케네디 대통령을 꼽는다. 포드, 부시 대통령도 이 유형에 속한다. 반면 카터 대통령은 이 유형 중 실패한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패기가 있다. 적극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때문에 성취욕이 강하고 결과 중심적인 국정 운영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을 벌이게 되고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다.
또한, 자기 생각이 강한 탓에 그의 참모들은 종종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정책집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김 위원장의 경우 공개적으로 활달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태도는 장점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고지도자로서 다소 경솔하다는 인상도 준다.
'ISO9001,14001 주요항목 > 1. 기획'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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